다이고 다다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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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다이고 다다시게는 일본 제국의 해군 군인이자, 화족 다이고 후작가의 후손으로, 태평양 전쟁 중 해군 중장으로 복무했다. 그는 해군병학교를 졸업하고 장갑순양함, 전함, 구축함 등에서 복무했으며, 잠수함 부대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전쟁 말기에는 제6함대 사령관으로 가이텐 특공 작전에 관여했다. 전쟁 후 폰티아나크 사건과 관련하여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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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고 다다시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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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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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이름 | 다이고 다다시게 |
본명 | 醍醐 忠重 (일본어) |
로마자 표기 | Daigo Tadashige |
출생 | 1891년 10월 15일 |
출생지 | 일본, 도쿄, 지요다구 |
사망 | 1947년 12월 6일 |
사망지 | 네덜란드령 동인도, 보르네오, 폰티아낙 |
사망 원인 | 총살형 |
군사 정보 | |
소속 | 일본 제국 |
복무 기간 | 1912년 – 1945년 |
군종 | 일본 제국 해군 |
최종 계급 | 해군 중장 |
지휘 경력 | 일본 해군 잠수함 SS-27 일본 해군 잠수함 SS-57 일본 해군 잠수함 Ro-64 일본 해군 순양함 유바리 일본 해군 순양함 나카 일본 해군 순양함 구마 일본 해군 순양함 이와테 일본 해군 순양함 도키와 일본 해군 순양함 야쿠모 일본 해군 순양함 아시가라 잠수함 제5전대 동부 공격 부대 해군 잠수함 학교 구레 잠수함 전대 제6함대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사라왁 침공 미드웨이 해전 |
기타 정보 | |
전범 재판 | A급 전범으로 기소, 사형 선고 받음 |
2. 생애
도쿄 지요다구 출신으로, 공경 화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가쿠슈인 학습원을 거쳐 1912년 일본 제국 해군 사관학교를 40기로 졸업했다. 입학 당시 성적은 하위권이었으나 졸업 시에는 144명 중 17위로 크게 향상되었다.[2]
해군 소위로 임관한 후 순양함 도키와 등에서 근무했으며, 1913년 중위 진급 후에는 잠시 귀족원 의원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후 전함 콩고, 구축함 우라카제 등에서 복무했다.
1918년 대위로 진급하고 어뢰 과정을 수료한 뒤 잠수함 분야에서 경력을 쌓기 시작하여, 여러 잠수함에서 근무하고 함장을 역임했다. 1924년 소령으로 진급했고, 잠수함 Ro-64 함장, 전함 야마시로의 수석 어뢰 장교 등을 지냈다.
1930년대에는 해군 대좌까지 진급하며 경순양함 유바리, 나카, 쿠마, 중순양함 아시가라 등 다수의 순양함 함장을 역임했다. 1940년 11월 15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는 경순양함 유라를 기함으로 하는 제5잠수전대 사령관이었다. 제5잠수전대는 말라야 침공 지원, 사라왁 침공 지원 등의 작전에 참여했으며, 미드웨이 해전에도 참가했다.
1943년 11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한 후, 일본 동부 해안 방면의 동부 공격 부대 사령관을 맡아 소형 잠수함 운용 및 적 상선 공격을 지휘했다.[3]
1944년 8월부터 해군 잠수함 학교 교장을 지냈고, 1945년 5월부터는 일본 제국 해군 제6함대의 마지막 사령장관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인간 어뢰인 '가이텐' 특공 작전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다.
종전 후, 다이고는 SCAP 당국에 의해 네덜란드 정부의 요청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바타비아로 송환되어, 폰티아낙 사건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폰티아낙에서 열린 비공개 군사 재판소에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한 채 유죄 판결을 받았고, 1947년 12월 6일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명목상 그의 지휘 하에 있던 부대의 만행에 대한 지휘 책임 문제였으나, 사건과의 직접적인 연관성 및 재판 과정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4]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891년 10월 15일 도쿄 지요다구 모토조노초에서 공경 화족 (청화가)이자 후지와라 귀족 혈통인 다이고 가문의 다이고 타다유키 후작의 삼남으로 태어났다.[6] 아버지 다이고 타다유키는 보신 전쟁에서 오우 진무 부총독을 지냈으나, 1899년 가독 상속 문제로 조카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가세가 기울자, 다이고는 공경 섭가인 이치조가에 맡겨져 자랐다. 황족 카야노미야 쓰네노리 왕은 그의 사촌이다.1897년 도쿄시 고지마치 심상 소학교(현 고지마치 초등학교)에 입학했고,[7] 1900년 가쿠슈인 초등과 3학년으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같은 해 8월 18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작 작위를 계승했다. 1906년 가쿠슈인 중등과에 진학했다.
1909년 9월 11일 해군을 지망하여 해군병학교 제40기 생도로 입교했다. 입교 당시 성적은 150명 중 126위로 하위권이었으나,[2] 학업과 훈련에 매진하여 1910년 7월 17일 품행 우량장을 수상했다. 1912년 7월 17일 해군병학교를 144명 중 17위의 성적으로 졸업했다.[2]
졸업과 동시에 해군 소위 후보생이 되어 장갑순양함 아즈마에 승선하여 실무 수습을 받았다. 1912년 12월 5일부터 1913년 4월 21일까지 연습 함대 소속으로 중남부 태평양 방면 원양 항해에 참가했다. 귀국 후 5월 1일부터는 전함 시키시마에서 근무했다. 1913년 12월 1일 해군 소위로 정식 임관했다.
2. 2. 해군 복무
1909년 9월 11일 해군병학교(40기)에 입교했다. 입교 당시 성적은 150명 중 126위였으나, 꾸준히 노력하여 1912년 7월 17일 졸업 시에는 144명 중 17위로 성적을 크게 향상시켰다.[2] 졸업과 동시에 해군 소위후보생이 되어 장갑순양함 아즈마에 승선하여 실무 수습을 시작했다. 같은 해 12월 5일부터 연습 함대 소속으로 원양 항해에 나서 중남부 태평양 방면을 순항하고 1913년 4월 21일 귀국했다. 이후 5월 1일부터 전함 시키시마에서 근무했다.1913년 12월 1일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1914년 1월 15일에는 장갑순양함 도키와로 옮겨 근무했다. 1915년 12월 7일 요코스카 진수부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12월 13일 해군 중위로 진급함과 동시에 해군 포술 학교 보통과 학생으로 입교했고, 1916년 6월 1일부터는 해군 수뢰 학교 보통과 학생으로 교육을 받았다. 교육 수료 후 잠시 귀족원 의원으로서의 의무를 위해 휴가를 받았으나, 곧 현역으로 복귀하여 전함 콩고(1916년 12월 1일 부임)와 구축함 우라카제(초대, 1917년 4월 1일 부임)에서 근무했다.
1918년 12월 1일 해군 대위로 진급하고 해군 수뢰 학교 고등과 과정을 이수했다. 이후 잠수함 분야로 진로를 정하여 제12 잠수대 소속 잠수함장(1919년 12월 1일 부임) 등을 거쳐 제26 잠수함(1920년 12월 1일 부임), 제27 잠수함(1921년 7월 1일 함장 취임), 제57 잠수함(1923년 5월 15일 함장 취임) 등에서 근무했다. 1922년 3월 15일부터는 제27 잠수함 함장과 해군 잠수 학교 교관을 겸임하기도 했으나, 같은 해 5월 30일 공무 중 부상을 입어 장기간 요양했다. 복귀 후 1923년 3월 20일 순양함 아소의 분대장, 1924년 5월 10일 해방함 아사마의 분대장을 지냈다.
1924년 12월 1일 해군 소좌로 진급했다. 1925년 1월 15일부터 로호 64 잠수함의 장비 담당 장교로 근무하다가, 3개월 뒤인 4월 30일에는 해당 잠수함의 함장이 되었다. 1926년 후반에는 전함 야마시로의 수뢰장(수석 어뢰 장교) 겸 분대장을 맡았다. 1929년 11월 30일 해군 중좌로 진급함과 동시에 해군 수뢰 학교, 포술 학교, 잠수 학교 교관을 겸임했고, 육군 중포병 학교 교관으로도 초빙되는 등 해군 내 잠수함 및 어뢰 분야 전문가로서 입지를 다졌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제9 잠수대 사령(1932년 12월 1일), 제19 잠수대 사령(1933년 11월 15일)을 역임했다. 1934년 11월 15일 해군 대좌로 진급하며 경순양함 유바리 함장이 되었고, 이후 경순양함 나카(1935년 5월 25일), 경순양함 쿠마(1935년 11월 15일), 중순양함 다카오(1936년 12월 1일), 중순양함 아시가라(1938년 6월 3일) 등 여러 순양함의 함장을 차례로 맡았다. 이외에도 장갑순양함 이와테, 도키와, 야쿠모 등에서도 지휘관 경력을 쌓았다. 1940년 11월 15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에는 경순양함 유라를 기함으로 하는 제5잠수전대 사령관이었다. 진주만 공격이 있던 시기, 제5잠수전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까마우 곶 남쪽 해상에서 말라야 침공 부대의 제1진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1년 12월 9일, 제5잠수전대는 영국 해군 Z 부대(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전함 리펄스 및 호위 구축함)를 추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잠수함 I-165가 영국 함대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기함 ''유라''가 수신했지만, 통신 상태 불량으로 인해 즉각적인 대응이 어려웠고, 결국 영국 함대는 잠수함 부대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인도차이나에서 발진한 일본 해군 제22항공전대 소속 어뢰 폭격기의 공격으로 격침되었다.
이후 제5잠수전대는 12월 13일부터 26일까지 사라왁 침공 작전에 투입되어 브루나이, 미리, 세리아, 쿠칭 등지의 상륙 작전을 지원했다. 일본군은 "가와구치 지대" 병력 2,500명과 제2요코스카 특별 해군 육전대를 투입하여 미리의 비행장과 유전 지대를 빠르게 점령했다. 작전 완료 후 ''유라''는 연말까지 인도차이나의 캄란만 기지로 복귀했다.
제5잠수전대는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도 전방 초계 부대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1943년 11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일본 동부 해안 방면에서 소형 잠수함 운용 및 적 상선 공격을 담당하는 동부 공격 부대 사령관을 맡았다.[3]
1944년 8월 23일부터는 해군 잠수함 학교 교장으로 부임했고, 1945년 5월 1일에는 일본 제국 해군 제6함대의 마지막 사령장관이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살 특공 병기인 '가이텐' 인간 어뢰 프로그램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종전 후, 다이고는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 당국에 의해 네덜란드 정부의 요청으로 체포되었다. 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바타비아(현 자카르타)로 이송되어, 폰티아낙 사건 당시 폰티아낙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21,000여 명(여성과 어린이 포함)에 대한 납치, 고문, 학살에 연루된 혐의로 전범 재판에 회부되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수개월간 구금된 후, 폰티아낙에서 열린 비공개 군사 재판소에서 단 3시간의 심리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제대로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유죄 판결 후 1947년 12월 6일 복부에 총격을 당하는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다이고는 잠수함 부대 지휘관이었고, 1943년 11월 8일부터 보르네오 발릭파판에 주둔한 제22특별경비대가 명목상 그의 지휘 하에 있었지만, 1943년 4월 23일부터 1944년 6월 28일 사이에 폰티아낙에서 발생한 사건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명목상 지휘 하에 있던 부하들의 잔학 행위에 대한 지휘 책임(소위 'B급 전범')으로 기소된 다른 장교들이 수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들과 비교할 때,[4] 그의 재판이 매우 신속하고 비밀리에 진행된 점, 그리고 처벌의 가혹함과 잔인성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보직 | 기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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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조원, 전함 콩고 | 1916년 12월 1일 – 1917년 4월 1일 |
장비 주임 장교, 잠수함 로호 64 | 1925년 1월 15일 – 1925년 4월 30일 |
함장, 잠수함 로호 64 | 1925년 4월 30일 – 1925년 12월 1일 |
참모 장교, 요코스카 진수부 | 1925년 12월 1일 – 1926년 3월 1일 |
제9잠수대 사령관 | 1932년 12월 1일 – 1933년 11월 15일 |
제19잠수대 사령관 | 1933년 11월 15일 – 1934년 11월 15일 |
함장, 경순양함 유바리 | 1934년 11월 15일 – 1935년 5월 25일 |
함장, 경순양함 나카 | 1935년 5월 25일 – 1935년 11월 15일 |
함장, 경순양함 쿠마 | 1935년 11월 15일 – 1936년 12월 1일 |
함장, 중순양함 다카오 | 1936년 12월 1일 – 1938년 6월 3일 |
함장, 중순양함 아시가라 | 1938년 6월 3일 – 1938년 12월 1일 |
제5잠수전대 사령관 | 1941년 10월 20일 – 1942년 7월 10일 |
구레 잠수전대 지휘관 대리 | 1942년 8월 31일 – 1943년 4월 1일 |
제11잠수전대 사령관 | 1943년 4월 1일 – 1943년 10월 20일 |
제6함대 사령장관 | 1945년 5월 1일 – 1945년 9월 15일 |
계급 | 진급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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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후보생 | 1912년 7월 17일 |
소위 | 1913년 12월 1일 |
중위 | 1915년 12월 13일 |
대위 | 1918년 12월 1일 |
소좌 | 1924년 12월 1일 |
중좌 | 1929년 11월 30일 |
대좌 | 1934년 11월 15일 |
소장 | 1940년 11월 15일 |
중장 | 1943년 11월 1일 |
2. 3. 태평양 전쟁 참전
1940년 11월 15일 해군 소장으로 진급했고, 1941년 10월 20일에는 제5 잠수전대 사령관에 취임했다.다이고는 태평양 전쟁 발발 당시 경순양함 유라를 기함으로 제5잠수전대를 지휘했다. 진주만 공격 당시 제5잠수전대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까마우 곶 남쪽에서 말라야 침공 부대의 제1파를 지원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9일, 제5잠수전대는 영국 해군 Z 부대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순양전함 리펄스 및 지원 구축함)를 추격하여 격침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비록 ''유라''는 잠수함 ''I-65''로부터 영국 함선 발견 정보를 받았지만, 무선 수신 불량으로 신호가 불분명했고, ''유라''와 잠수함이 행동을 취하기 전에 영국 함선은 인도차이나 기지에서 출격한 제22항공대의 어뢰 폭격기에 의해 격침되었다.
제5잠수전대는 12월 13일부터 26일까지 사라왁 침공에 투입되어 브루나이, 미리, 세리아, 쿠칭 상륙을 지원했다. "가와구치 부대"의 2,500명과 제2요코스카 특별 해군 육전대는 미리의 비행장과 유전을 신속하게 점령했다. 작전 완료 후, ''유라''는 연말까지 인도차이나 캄란만 기지로 귀환했다.
제5잠수전대는 미드웨이 해전에도 전진 차단 부대의 일부로 참가했다.
1942년 7월 14일에는 군령부 출사로 근무했고, 같은 해 8월 31일에는 구레 잠수전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이후 1943년 4월 1일에는 제11 잠수전대 사령관 등을 역임했으며, 같은 해 10월 20일에는 다시 군령부로 출사했다.
1943년 11월 1일 해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그는 일본 동해안에서 소형 잠수함 및 상선 공격을 수행하는 동부 공격 부대의 지휘를 맡았다.[3] 또한 같은 해 11월 8일부터는 보르네오 발릭파판에 주둔한 제22 특별 근거지대 사령관을 맡았다.
다이고는 1944년 8월 23일 구레 잠수전대 사령관으로 복귀하며 구레 해군 잠수학교 교장을 겸임했고, 1945년 5월 1일부터 일본 제국 해군 제6함대의 마지막 사령관이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는 인간 어뢰 ''가이텐'' 프로그램에 깊이 관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 다이고는 SCAP 당국에 의해 네덜란드 정부의 요청으로 체포되어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바타비아로 송환되었다. 그는 폰티아나크 사건 동안 폰티아나크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21,000명(여성과 어린이를 포함)의 납치, 고문, 학살과 관련된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가혹한 환경에서 몇 달 동안 구금된 후, 그는 폰티아나크에서 열린 비공개 군사 재판소에서 단 3시간의 심리 끝에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1947년 12월 6일 복부에 소총 사격을 받아 처형되었다. 다이고는 잠수함 부대 사령관이었고, 명목상 그의 지휘하에 있던 제22특별근거지대는 1943년 11월 8일부터 발릭파판에 주둔했지만, 1943년 4월 23일부터 1944년 6월 28일까지 폰티아나크에서 발생한 사건과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명목상 지휘 하 부하들의 만행에 대한 지휘관 책임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다른 "B급" 전범들이 수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와 비교할 때,[4] 그의 재판의 신속성과 비밀성, 그리고 처벌의 심각성과 잔혹성은 여전히 의문을 남긴다.
2. 4. 제6함대 사령장관과 가이텐 특공 작전
1944년 8월 29일 구레 해군 잠수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일본 제국의 전황이 악화되던 1945년 5월 1일에는 제6함대의 마지막 사령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제6함대는 잠수함 부대를 총괄하는 함대였고, 다이고는 해군 잠수함 학교 사령관 시절부터 제6함대 사령장관에 이르기까지 ''가이텐'' 인간 어뢰 프로그램에 관여했다.그는 사심 없고 성실하며 강건한 사령관으로서 부하들에게 존경받았다고 전해진다.[10] 태평양 전쟁 종전을 제6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맞이했으며, 이후 함대에서 보관하던 약 5만 엔의 기밀비를 사용하여 1946년부터 부하 등을 통해 종전까지 출격했던 가이텐 특별공격대 대원들의 영전에 조사와 향료를 바쳤다. 야스쿠니 신사 내 유슈칸에는 다이고의 유품인 해군 군모가 전시되어 있다.
2. 5. 전범 재판과 처형
1945년 8월 15일 종전을 맞이한 후, 다이고는 같은 해 9월 15일 구 일본 해군 군령부에 출근하였고, 9월 25일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제6함대 사령장관으로서 보관하고 있던 약 5만엔의 기밀비는, 1946년부터 부하 등을 통해 종전까지 출격했던 가이텐 특별공격대 대원들의 영전에 조사(弔詞) 및 향료와 함께 전달되었다.[10]전쟁이 끝난 후, 다이고는 SCAP 당국에 의해 네덜란드 정부의 요청으로 1946년 12월 일본 내에서 체포되어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바타비아로 송환되어, 폰티아나크 사건 당시 폰티아나크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21,000여 명(여성과 어린이 포함)의 납치, 고문, 학살과 관련된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다이고는 1943년부터 약 1년간 제22특별근거지대 사령관으로서 보르네오 발릭파판에 주둔했는데, 당시 현지 화교의 항일 활동으로 일본군 부대가 위험에 처하자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 전후 문제가 되었다. 명목상 그의 지휘 하에 있던 제22특별경비대는 1943년 11월 8일부터 발릭파판에 주둔했으나, 1943년 4월 23일부터 1944년 6월 28일까지 폰티아나크에서 발생한 사건과 다이고의 직접적인 연관성은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4]
1947년 인도네시아로 이송된 다이고는 같은 해 9월 22일 재판을 받았다. 약 3시간 동안 진행된 재판에서 그는 자신에게 유리한 사실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고 전해진다. 재판은 폰티아나크에서 비공개 군사 재판소 형태로 진행되었으며, 가혹한 환경에서의 구금 끝에 열린 재판에서 다이고는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제대로 갖지 못했다. 결국 10월 3일, 약 5분 만에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4] 부하들의 만행에 대한 지휘 책임을 물어 유죄 판결을 받은 다른 "B급" 전범들이 통상 수년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던 점[4]과 비교할 때, 재판의 신속함과 비공개성, 그리고 사형이라는 처벌의 엄중함은 여전히 의문을 남기고 있다.[4]
사형 판결 후 다이고는 폰티아나크 감옥에 수용되었다. 1947년 11월 28일, 공직 추방 가(假)지정을 받고[11], 12월 4일 이틀 뒤 사형 집행 통보를 받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여러분, 오랫동안 신세를 져서 감사합니다.
9월 22일 약 3시간의 재판이 있었고, 10월 3일 약 5분 만에 판결, 사형 선고를 받았으며,
12월 6일 오전 8시 사형 집행의 뜻을 어제 12월 4일 오전 통보받았습니다.
별다른 마음의 동요도 없고, 의외로 평소와 다르지 않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탄원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격에 젖어 읽었습니다.
(중략)
부디 일본 재건에 각자의 사명에 전력을 다해주시길 바라며, 저도 영계에서 또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일본 재건에 전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제 부하 전사자 유족들의 일도 마음에 새겨주시길 바랍니다.
1947년 12월 6일 오전 8시, 다이고는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검은색 양복과 라사 모자 차림으로 형장에 나서 기미가요를 부른 뒤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했다. 이후 12명의 총수에 의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 향년 56세였다. 그의 유품인 해군 군모는 야스쿠니 신사 내 유슈칸(遊就館)에 전시되어 있다.
3. 가족 관계
- '''아내''': 아키코(모리 모토아키 공작의 딸)
- * '''장남''': 다이고 타다요시
- * '''차남''': 다이고 타다히사
- * '''장녀''': 키요코 (난고 시게시게 부인)
- * '''차녀''': 미츠코 (마츠다이라 나가요시 자작 부인)
- * '''삼녀''': 카즈코 (쿠로다 나가히사 야마시나 조류 연구소 소장 부인)
4. 계보
다이고 가문은 이치조 아키요시의 아들인 다이고 후유모토를 시조로 하는 신가(新家)이며, 아홉 세이카 가문 중 하나였다.[5] 다이고 다다시게는 고요제이 천황의 남계 9대손으로, 고요제이 천황의 아홉째 아들이자 이치조 가문을 계승한 이치조 아키요시의 후예이다.[5]
그의 아버지는 醍醐忠敬|다이고 다다유키일본어(1849-1899)이며, 할아버지는 초대 후작 醍醐忠順|다이고 타다오사일본어(1830-1900)이다.[5] 증조할아버지는 醍醐輝弘|다이고 테루히로일본어(1791-1859)이고, 고조할아버지는 醍醐輝久|다이고 테루히사일본어(1760-1801)이다.[5]
5. 서훈
참조
[1]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2]
서적
Imperial Japanese Navy
[3]
서적
War Beneath the Sea: Submarine Conflict During World War II
[4]
서적
Victor's Justice
[5]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0-05-05
[6]
웹사이트
醍醐忠重 ]『人事興信録』データペース、第8版 [昭和3(1928)年7月
https://jahis.law.na[...]
[7]
서적
『人間魚雷 特攻兵器「回天」と若人たち』
[[新潮社]]
1983
[8]
간행물
『官報』第1264号
1916-10-16
[9]
간행물
『官報』第5795号
1946-05-13
[10]
서적
華族総覧
講談社現代新書
[11]
문서
公職追放に関する覚書該当者名簿
日比谷政経会
[12]
간행물
『帝国議会会議録』第41議会 貴族院「貴族院議員の異動」
[13]
간행물
『帝国議会会議録』第47議会 貴族院「貴族院議員異動」
[14]
간행물
『官報』第883号「叙任及辞令」
1929-12-07
[15]
간행물
『[[官報]]』第5529号「叙任及辞令」
1945-06-20
[16]
간행물
『[[官報]]』号外「辞令」
1922-06-22
[17]
간행물
『帝国議会会議録』第56議会 貴族院「貴族院議員異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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